에세이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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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회로 너머의 문장(남궁찬)
전기회로는 정확하다.
전압, 전류, 저항의 계산이 맞아떨어져야 회로는 동작하고, 설비는 작동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전기과를 선택했다. 손에 잡히는 기술을 배우면, 삶이 조금 더 안정적이고 단단해질 것이라 믿었다. 처음엔 전기설비의 구조가 신기했고, 배선 하나를 직접 설계할 때면 성취감도 느꼈다. 실습 시간마다 나사는 조여졌고, 전선은 정리되었고, 나 역시 어딘가로 조용히 맞춰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회로가 멈춘 듯한 순간이 찾아왔다.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믿고 의지하던 형이 떠났다. 그날 이후로 어떤 도면도, 어떤 흐름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용히 꺼져버린 듯했다. 내 마음속 회로는 단락되어 있었고, 감정은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한 채 공중에 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걷던 그때, 형이 남긴 얇은 노트를 발견했다. 그 안엔 형이 끄적이던 짧은 문장들이 있었다.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말들이 내 마음을 깊이 통과해 갔다. 전기보다 빠르고, 전기보다 따뜻했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엉성한 글씨체는 내게 다가온 문학의 시작이었다. 마음속에 숨어 있던 말을 글로 풀 수 있다면, 어쩌면 형과 다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문장을 쓸 때마다 형이 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글은 형과 나를 이어주는 조용한 전선이다.
그날 이후 회로 대신 문장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서 읽은 소설 속 인물이 전선처럼 엮이었고, 산문 속 한 문장이 내 일상의 배선도를 바꿨다. 친구들이 회로 시험과 싸울 때, 나는 문장과 싸우고 있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작업복을 벗고 책상 앞에 앉는 일은 어색했고, 국어책을 펼칠 때마다 전공의 압박감이 따라왔다. 선생님은 물으셨다. “왜 국문학과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되뇌었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건 괜찮다. 가끔은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형이 좋아하던 글을, 이제는 나의 목소리로 써보고 싶었다. 그건 단지 글이 아니라, 내가 다시 살아가기 위한 전류 같은 것이었다.
형의 노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여전히 멈춰 있었을 것이다. 감정은 닫혀 있고, 전기만 따라가며 내 마음을 잊은 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형의 흔적을 다시 찾지 못했다면, 나는 내 안의 비어있는 공간을 영영 모른 척하며 살았을 것이다. 형이 남긴 짧은 문장들이 내 닫힌 회로를 열었고, 나는 그때부터 조금씩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글을 쓰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정말 그런 것 같고, 또 어떤 날은 억지로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타인에게 속삭이듯 다가가고 싶어서 브런치(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적었지만, 마음이 시끄러운 사람들에게 거리감 없이 다가와 주고, 편히 기댈 수 있는 정류장이 되고 싶었다.
나는 형에게 많은 걸 배웠다. 멀리서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내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던 형처럼, 누군가의 걸음에 가만히 함께하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 친구들의 곁을 걸으며, 낯선 사람들을 만나 그런 사람이 되는 법을 어쩌면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려울 때 말없이 곁을 내어주고, 필요할 때 조용히 등을 밀어주는 사람. 묵묵히, 단단하게 누군가를 지지하는 사람. 형이 내게 그랬듯,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가가고 싶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더 천천히, 더 깊이, 혼자 쓰는 글이 아닌 함께 걸었던 시간이 담긴 글을 쓰고 싶다.
이 여정의 끝에서, 나는 더 천천히 걷고, 더 깊이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매 순간 소중함을 잊지 않고, 스쳐 지나갈 사람의 마음도 잠시 머물러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의 걸음이 누군가에게 작은 온기로 닿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전기회로가 삶의 바깥을 밝힌다면, 문장은 내 안을 켠다.
나는 둘 사이를 잇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흐름으로.